1편 내용은 아래에서 확인해 주세요.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1)

드디어 김한석 감독의 이순신 일대기 영화 중 마지막 '노량'이 개봉했습니다. 노량해전이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이며 목숨을 바쳐 싸운 해전이기도 합니다. 이순신 장군님의 마지막 유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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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 이어서 작성하겠습니다.

 

이순신의 부친상과 백의종군

훈련원에서 2년 넘게 근무하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시 강등되어 변방으로 배치됩니다. 1583년(선조 16) 10월 건원보(지금 함경북도 경원군) 권관으로 가게 되는데, 이때 발생한 여진족의 침입에서 그는 우두머리를 생포하는 전공을 세워 한 달 만에 훈련원 참군(정 7품)으로 귀경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좋은 나날은 잠시이고, 그 달 아버지 이정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 당시 연락이 늦어지면서 이듬해 1월에야 소식을 전달받습니다. 그렇게 그는 3년상을 치르고, 1585년(선조 18) 사복시 주부(종 6품)로 복직합니다. 그의 나이 40세였습니다.

 

이순신은 유성룡의 천거로 다시 조산보(지금 함경북도 경흥) 만호로 특진해 변방으로 갑니다. 1년 반 뒤인 1587년(선조 20) 8월에는 녹둔도 둔전관을 겸임하게 됩니다. 녹둔도는 지금의 두만강 하구에 있는 섬입니다. 그 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해 아군 11명이 전사하고 군사와 백성 160여 명이 납치되었으며 말 15 필이 약탈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순신은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여진족을 격퇴하고 백성 60여 명을 구출합니다. 그전부터 이순신은 그 지역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중앙에 병력 증강을 요청했지만 묵살당합니다. 그런 어려운 측면은 무시되고 책임을 이순신과 경흥부사에게 떠넘깁니다. 그렇게 이순신은 백의종군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는데 1588년(선조 21) 1월 이일이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급습해 가옥 200여 채를 불사르고 380여 명을 죽인 보복전에서 이순신도 참전해 전공을 세움으로써 백의종군에서 벗어납니다. 반년 뒤 그는 아산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이순신의 이후 관직 변천사

 이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는 일부 대신들과 대간의 반대를 받기도 했지만, 상당히 빠르고 순조롭게 승진했습니다.

 
1589년(선조 22)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의 군관으로 복직
10월 선전관
12월 정읍현감
1590년(선조 23) 7월(유성룡 추천) 평안도 강계도호부 관내의 고사리진 병마참절제사(종 3품)
(대신과 삼사의 반대) 취소
8월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 (무산)
1591년 2월 진도군수 >>> 가리포(지금 완도) 수군첨절제사(종 3품)
2월 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 3품)

이렇듯 이순신은 우여곡절 끝에 전라좌수사로 임명되는데 그의 나이 46세였고, 임진왜란 14개월 전이었습니다. 그는 무과에 급제한 지 15년 동안 한 번의 백의종군과 여러 곤경, 부침을 겪으면서 끝내 수군의 주요 지휘관의 자리에 올라섭니다.

임진왜란과 이순신의 백의종군

익히 잘 알려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이순신은 임진년(1592) 5월 7일 옥포해전부터 계유년(1598) 11월 18일 노량해전까지 20여 회의 전투를 치러서 모두 승리했습니다. 이런 승전으로 전황이 크게 바뀌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1년 뒤인 1593년 8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해 해군을 통솔하면서 적들을 크게 물리쳤고, 적들의 공포의 대상이 됩니다. 지난 과거의 행적을 돌이켜볼 때 아이러니하게도 이순신 장군은 이때가 가장 안정적인 관직 생활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

하지만 그 고난이 또 찾아오는데 1597년(선조 30) 1월, 그는 왜군을 부산 바다에서 크게 섬멸하라는 어명을 어기고 나아가지 않아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됩니다. 죽음 직전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4월 1일 겨우 살아서 풀려나 백의종군을 하게 됩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때에 이순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십니다. 그는 나흘 동안(4월 16~19일) 말미를 얻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 다시 종군합니다. 마음이 얼마나 사무치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있습니다.

16일 병자. 흐리고 비가 내렸다. 배를 끌어 중방포에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실어 본가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고 통곡하니 찢어지는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가 크게 퍼부었다. 남쪽으로 떠날 일도 급박했다. 부르짖어 통곡하며 속히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 난중일기 중에서

이후 이야기는 영화 '명량'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쓴 리뷰가 있으니 링크 걸어놓겠습니다.

 

 

13척의 배로 승리를 이룬 해전, '명량' 영화 리뷰

때는 1597년, 왜군의 1차 침략인 임진왜란 이후 휴전 협상이 결렬되어 또다시 침략한 정유재란이 발발한다. 천하의 도도님을 기다리게 하는 자가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이번 싸움에 꼭 필요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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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과 이순신의 최후

1597년 재침한 왜군은 그 해 9월 명량해전에서 패배한 뒤 육전에서도 계속 고전합니다. 다음 해 8월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왜군은 순천 등지로 집결하면서 철수작전을 서두르게 됩니다.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함께 1598년 9월 고금도 수군 진영을 떠나 노량 근해에 이르렀습니다. 명나라 육군장 유정과 수륙합동작전을 펴 왜교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 고니시의 부대를 섬멸하기 위함이었죠.

 

그때 고니시는 수륙 양면으로 위협을 받게 되자,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이에 진린은 고니시가 마지막으로 요청한 통신선 1척을 빠져나가게 하고, 이순신에게 이 사실을 알렸죠. 고니시는 통신선으로 사천 등지의 시마쓰와 연락해 남해·부산 등지에 있는 왜군 수군의 구원을 받아 조·명 연합수군을 협공하면서 퇴각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한 고니시의 전략을 꿰뚫어 본 이순신은 진린을 꾸짖고 함께 진형을 재정비해 왜군을 맞아 격멸하기로 합니다. 11월 18일 밤 이순신의 예견대로 노량 수로와 왜교 등지에는 500여 척의 왜선이 집결해 협공할 위세를 보였습니다. 200여 척의 조·명 연합군을 거느린 이순신은 이렇게 말하며 하늘에 빌고 전투태세에 들어갑니다.

이 원수만 무찌른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19일 새벽, 싸움은 막바지에 이르고 이순신과 진린은 서로 위급함을 구하면서 전투를 독려하자 왜의 수군 선박 200여 척이 불에 타서 침몰하거나 파손되고 100여 척이 이순신 함대에 나포되었으며 나머지 패잔선들이 관음포 방향으로 달아났습니다. 여기서 이순신은 관음포로 도주하는 마지막 왜군을 추격하던 중 총환을 맞고 쓰러지면서 마지막 유언을 남깁니다.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처음부터 끝까지 강직하고 고귀한 인생을 살다가신 성웅 이순신 장군님이 큰 별이 되어 떠나갔습니다. 이 해전에서 명나라 장수 등자룡과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등이 전사했습니다. 한편, 순천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해 시마쓰의 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 왜 나라로 철수합니다. 이렇게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은 끝이 납니다.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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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도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전투가 끝난 뒤 알려져 많은 수군 병사들과 진린까지도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알려집니다.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두고 많은 추모글을 남겼으나, 저는 이 말이 생각납니다. 

살아서는 목숨을 바쳐 싸웠고, 죽어서는 죽어도 살았도다.

강직하고 올곧은 성품에 원칙을 중시하는 모습은 쉬이 따라 할 수 없는 언행일치의 선비 모습입니다. 처음과 끝이 같으니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인물 같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영생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요.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영원히 존경받고 잊히지 않는다면 이것이 영생이 아닐까 하고요. 이상으로 글을 줄이겠습니다. 구독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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