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김한석 감독의 이순신 일대기 영화 중 마지막 '노량'이 개봉했습니다. 노량해전이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이며 목숨을 바쳐 싸운 해전이기도 합니다. 이순신 장군님의 마지막 유언은 '전투가 급하니 나의 죽음을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였습니다. 영화 '명량'으로 한 차례 소개해 드렸는데요. 이번에는 이순신 장군님의 일대기와 노량해전을 간추려서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유년 시절

1545년 봄, 이순신은 서울 건천동에서 사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덕수 이 씨의 양반 가문으로 과거 선조들이 정 3품, 정1품에 오르기도 했으나,  조광조 일파로 몰리면서 조부 이백록과 아버지 이정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벼슬길에도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런 집안에서 태어난 이순신은 서울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는데, 거기서 인생에서 큰 인연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서애 유성룡(1542~1607)입니다. 서로 세 살 차이인 두 사람은 그 뒤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국난을 맞아서 조선을 구원하는데 각각 문무에서 활약합니다. 조선 태종 이방원이 온갖 살육을 하면서도 가장 잘한 일은 세종대왕을 후계자로 만든 것처럼 유성룡이 가장 잘 한 업적으로 이순신을 적극 옹호하고 천거하여 전라좌수사로 세운 일입니다. 유성룡은 정말 놀라운 혜안을 가진 영의정이었습니다. 그런 유성룡이 기억하는 어릴 적 이순신에 대한 자료가 있습니다.

 
 신의 집은 이순신과 같은 동네였기 때문에 그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다. - 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27일
이순신은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했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 말 타고 활쏘기를 잘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 징비록 중에서

징비록은 서애 유성룡이 쓴 책입니다. 임진왜란 동안 경험한 내용을 후세에 전달하면서 이런 치욕은 두 번 다시 겪지 않기를 바라며 집필한 책이죠. 이렇듯 유성룡은 실제로 어릴 적부터 이순신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

이순신 장군의 혼인과 과거 급제

몇 살때인지는 모르나 서울을 떠나 외가가 있는 충남 아산으로 이사를 갑니다. 아산에는 현재 현충사와 묘소가 있어서 가장 연고가 깊은 지역으로 알려졌죠. 그 뒤 1565년 이순신은 20세의 나이로 상주 방 씨와 혼인을 합니다. 장인은 보성 군수를 지낸 인물로 알려집니다. 결혼 후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무인의 자질을 보였지만, 그 당시에는 문을 중시하고 무를 멸시하는 풍조가 있어서인지 문과에 응시하려고 했죠. 그렇게 10년 동안 문과를 준비하던 중에 장인의 적극적인 권유로 무과로 전향하기로 합니다. 그렇게 첫 훈련원 병과에 응시하지만 말을 타던 중 낙마하여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물론 낙방했지만, 다시 일어나 버드나무껍질을 벗겨 다친 다리를 싸매고 다시 시험에 응시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4년이 지난 뒤에 다시 무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관직생활이 시작됩니다. 이순신 나이 31세로 1576년(선조 9)입니다. 

이순신의 문무가 뛰어났는지 이때에 무과에 급제한 이순신에게 당시 병조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서출 딸을 이순신에게 첩으로 보내려 했지만, 이순신은 이렇게 화답했다고 합니다. 

벼슬길에 갓 나선 몸으로 어찌 권세가에 기대어 의롭지 못한 영달을 구하겠는가 -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책 중에서 

이때에는 첩 문화가 있어서 문제가 되지는 않았으나, 이순신은 의롭지 못하다고 하며 거절했다고 하죠. 이후 이순신은 함경도에 있는 해안 국경을 수비하는 야전에서 초급 장교로 생활하게 됩니다.

이순신의 관직 생활

함경도 삼수에서 권관으로 시작한 이순신은 험준산 산지와 강추위 속에서 햇수로 3년을 보내게 됩니다. 그렇게 만기를 채우고 1597년(선조 12) 2월 서울로 내려와 훈련원 봉사(종 9품)로 배속됩니다. 고향인 서울에서 잘 지내나 싶었는데 사건이 터지고 말죠. 병조정랑(정 5품) 서익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고 하자 이순신이 반대했고, 그로 인해 충청도절도사의 군관으로 좌천되고 맙니다. 핵심적인 요직인 병조정랑의 뜻을 종 8품의 봉사가 반대한 사건은 분명 이례적인 일이었죠.

많은 위인들이 그렇지만 바로 이런 측면이 그들을 평범한 사람들과 구분시키는 결정적인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순신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 중에 원칙을 엄수하는 강직한 모습일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일생동안 그를 크고 작은 곤경에 빠뜨리게 됩니다. 그러나 징비록에서 '이 사건 때문에 사람들이 이순신을 알게 되었다'라고 썼듯이, 그런 현실적 불익은 그의 명성을 조금씩 높였고, 궁극적으로는 지금까지도 그를 존경하는 역사의 보상으로 어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비로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얼마 뒤 이순신은 파격에 가까운 승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1580년(선조 13) 7월 발포(지금 전남 고흥군) 수군만호(종 4품)로 임명된 것이죠. 이 인사는 파격성도 주목되지만, 좀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처음으로 수군에 배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때에도 사건이 벌어지는데,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발포 객사의 오동나무를 베어가려고 하자 이순신이 관청 물건이라고 제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로 인해 인사조치는 뒤따르지 않았으나, 서익과의 악연이 이어집니다. 서익은 병기의 상태를 점검하는 군기경차관으로 발포에 내려왔는데, 이순신이 병기를 제대로 보수하지 않았다고 보고한 것입니다. 급속히 승진했던 이순신은 1581년(선조 14) 5월 두 해 전의 관직인 훈련원 봉사로 다시 강등됩니다. 

말직이지만 중앙에서 근무하게 된 이순신은 좋은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 당시 이름을 떨치던 율곡 이이가 이순신을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한 것이죠. 이조판서였던 이이는 유성룡을 통해 이순신에게 만남의 의사를 묻게 된 상황이었죠. 하지만 이순신은 이렇게 말하며 거절합니다. 

같은 가문(덕수 이 씨)이므로 만나도 괜찮지만, 지금은 그가 인사권을 행사하는 중직에 있으므로
만나지 않겠습니다.

탁월한 능력과 눈부신 경력으로 조선의 핵심적인 정치가로 자리 잡은 같은 가문의 이조판서가 그때까지도 변방과 중앙을 오가며 부침을 거듭하고 있던 종 8품의 말단 무관을 만나보고 싶어 했을 때, 부적절한 정실의 개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 거절한 이순신의 태도는 그 기록을 읽는 사람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이후 내용은 2편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구독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2)

1편 내용은 아래에서 확인해 주세요.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1) 드디어 김한석 감독의 이순신 일대기 영화 중 마지막 '노량'이 개봉했습니다. 노량해전이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이며 목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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