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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을 보며 1부

요즘 KBS 창립 50주년 기념 사극 '고려거란전쟁'이 인기를 얻어가고 있습니다. 다들 아시는 역사이겠지만, 귀주대첩을 이끈 강감찬 장군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회를 거듭할수록 인기몰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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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의 결사항전

1부에 이어서 내용을 작성하겠습니다. 이전 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이 쳐들어와 개경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이고 강감찬이 이끄는 10만 대군은 귀주에서 군사를 이끌고 있는 상황으로 개경을 지원토록 1만 군사를 내려 보낸 상황입니다. 거란군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개경을 함락하여 왕의 항복을 받아낼 심산인 것이죠. 하지만 현종은 두 번 다시 몽진은 없다고 선언하며 개경의 백성들과 생활물자 모두를 성 안으로 들이게 하여 결사항전에 돌입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소배압은 한 가지 책략을 생각해 냈는데, 어쩔 수 없이 퇴각하는 척하고 슬쩍 물러났다가 개경의 방비가 소홀해졌을 때 척후병을 보내 성문을 열어 쳐들어 갈 작전이었던 것이죠. 그렇게 전군 철수를 명령한 소배압은 몰래 척후병 300명만 개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금교역에 대기시켰는데, 이 계책마저 간파한 고려는 100여 명의 기병을 보내 거란군 300명을 공격해 사살하게 됩니다. 그렇게 이 책략마저 실패하고 말았고 고려의 청야전술로 인해 보급마저 없었으며 고려 영토 깊숙이 진입한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은 아무것도 못한 채 고립되고 맙니다. 그래서 결국 1019년 2월 소배압은 개경 공격을 포기하고 전군 퇴각하기로 결정하죠. 거란군은 평양 근처의 고려군을 피해 크게 우회해 연주, 위주에 도착했지만 추격해 온 강감찬의 고려군에 의해 또 피해를 입게 되며 고려군은 모든 퇴각로를 틀어막은 채 거란군을 귀주로 몰아가기 시작합니다. 

귀주 전투

강감찬은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한 큰 타격을 주기 위해 일전을 벌일 생각을 하고, 가지에 파견했던 전군을 귀주로 총집결하도록 명합니다. 귀주는 4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이고 귀주를 통과하는 길은 좁고 험한 계곡 사이에 있어서 도망가는 적을 몰아넣고 포위한 채 섬멸해 버리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거란군은 계속 이어져온 패전과 피로로 지속적인 타격을 입긴 했지만 당시 거란 최고의 장수였던 소배압의 통솔력으로 전투력은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요. 그렇게 강감찬의 고려군과 소배압의 거란군은 귀주의 동쪽 교외에서 맞닥뜨리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총집결 명령을 내렸는데 김종현이 거느리고 간 1만의 병력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도착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죠. 1만이나 되는 병력이 빠진 채 결전을 해야 했던 강감찬은 심리적으로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이 결전에서 잘못되면 고려 전체가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었죠. 

마침내 1019년 2월 1일, 거란군 역시 최후의 결전이라 생각한 듯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고려군을 보자마자 주저 없이 그대로 돌격합니다. 당시 귀주성 앞에는 두 갈래의 하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전략회의 끝에 소배압은 개천을 등뒤에 두는 배수진으로 고려군과 전투를 치르기로 결정합니다. 배수진을 친 거란군은 2달 가까이 굶주리고 추운 겨울날씨에 지친 상태에서 고려군에 쉴 새 없이 두들겨 맞았기에 부상병도 많았지만 최정예 병사답게 고려군에 맞서 투혼을 발휘합니다. 어느 군이 우세한지 알 수 없는 대혼전이 계속되던 가운데 그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김종현이 이끌던 1만 병력이 갑자기 거란군 뒤에서 나타납니다. 김종현의 군대는 대혼전 상황에 주저 없이 돌격해 들어가 거란군을 철저히 도륙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고려군 쪽으로 승기가 기울기 시작합니다. 또한 때마침 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오고 소나기가 내리면서 고려군의 사기는 더 올라갔으며, 이 기세를 몰아 맹렬히 공격해 들어가니 결국 거란군은 북쪽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퇴각하는 거란군을 집요하게 추격한 고려군에 의해 산과 들에 거란군의 시신이 널려있을 정도였으며 고려가 생포한 포로와 말, 갑옷, 투구 등 전리품은 셀 수 없이 많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이 전투에서 거란군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10만 거란 병력 중 고작 천여 명만 살아남아 요나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소배압은 갑옷과 무기 등을 버린 채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을 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정도였고, 거란의 유능한 장수들 여럿이 죽었을 만큼 처참한 패배였습니다. 이 귀주에서의 전투를 훗날 우리는 귀주대첩이라고 부릅니다. 이에 고려 입장에서는 대승 중의 대승이었는데 심지어 어찌나 크게 이겼는지, 고려사에 '우리가 거란과 싸운 이후 이렇게 거란이 패한 적이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패전의 소식을 들은 거란 성종은 전쟁의 총사령관이던 소배압의 낯가죽을 벗겨 죽이고 싶다라면서 격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배압을 죽이지는 않고 유배를 보낸 것으로 알려집니다. 

귀주대첩의 의미

고려는 대승으로 왕이던 현종이 직접 영파역까지 나가 강감찬을 맞이하며 축제 분위기가 되고 금으로 만든 꽃 8송이를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 주기도 했으며 이 승전 기념으로 영파역을 홍의역으로 바꾸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고려는 이후 120여 년간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고 귀주대첩 이후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침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귀주대첩은 살수대첩, 한산도대첩과 더불어 한국사 3대 대첩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귀주 전투는 삼국지를 떠오르게 합니다. 소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현실로 있었다는 역사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강감찬이 무신 출신이 아니라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요. 강감찬은 제갈공명 같은 지혜로 군을 통솔하였고 연륜에서 나오는 통찰력과 지략으로 판단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1만 기병을 이끈 김종현은 꼭 촉나라 조운 같아 보여서 삼국지가 이 전투를 참고하고 만든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마지막으로 현종이 개경성을 틀어막고 버티는 발상을 하는 지혜도 고려군의 승리에 큰 보탬이 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또다시 몽진을 하거나 중간에 성이 함락당했다면 역사는 바뀌었을 것입니다. 현명하게 대처한 현종 또한 승리의 주역일 것입니다. 현종과 강감찬의 쿵작이 맞았기에 승리한 전투라고 하겠습니다. 이후 현종은 죽는 날까지 강감찬의 은퇴를 저지하며 곁에서 머물기를 바라며 지팡이까지 하사했다고 합니다. 두 분의 인연이 정말 소름 돋게 대단한 것 같습니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떠나 두 분의 우정이 돋보이는 듯합니다. 인생에 마음이 맞는 벗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지 않을까요? 그럼 이만 글을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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