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화'서울의 봄'을 보고 저런 일이 있었냐면 흥분하고 워치의 심장박동수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SNS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그만큼 영화의 홍보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며 앞으로는 더 이상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번 글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쿠데타나 군사 반란이 생길 수 없다는 현역 사단장의 말을 빌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쿠데타라는 말은 프랑스어에서 나온 말로 '국가에 대한 일격'을 뜻합니다. 근현대 한국사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두 사건이 있습니다. 5.16과 12.12이죠. 두 사건은 이후 반란 주동자는 모두 최고 권력에 올라 군사정권으로 독재정치를 해왔습니다. 이번 글은 영화 '서울의 봄'을 배경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12.12사태의 전말을 살펴보겠습니다.

12.12 군사 반란

19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있었던 일입니다. 오늘이 2023년 12월 12일이니 정확히 44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단 9시간의 '어이없어 말이 안 나오는' 이야기가 영화 '서울의 봄'의 핵심 내용이죠. 많은 프로그램에서 다루어서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인데, 이 내용의 영화가 이렇게까지 흥행한다는 것이 조금 놀랍기도 합니다. 이 군사반란을 막을 기회는 생각보다 많았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무려 10번 정도 저지할 기회가 있다고 하죠. 그만큼 반란군의 계획은 치밀하지 못했고 오히려 '하찮은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사가 말해주듯 막지 못했죠. 당시 국민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반란을 막을 수 있는 많은 결정권자가 책임을 회피하거나 무능했습니다. 이를 영화로 표현하니 관객들은 열이 나서 흥분할 수밖에었었겠죠.

발단

1979년 10.26 사건이 일어나 대통령 박정희(朴正熙)가 사망한 뒤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全斗煥)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鄭昇和) 간에는 사건 수사와 군 인사 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습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金載圭)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 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습니다.

전개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兪學聖), 1 군단장 황영시(黃永時), 수도군단장 차규헌(車圭憲), 9 사단장 노태우(盧泰愚) 등과 함께 모의한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 사단장 박준병(朴俊炳), 1 공수여단장 박희도(朴熙道), 3 공수여단장 최세창(崔世昌), 5 공수여단장 장기오(張基梧) 등과 사전 접촉하였습니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李鶴捧)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許三守),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禹慶允)에게 정승화 연행 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이 계획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 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 헌병대 병력 50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압한 후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였습니다. 

한편, 정승화의 연행에 걸림돌을 없애기 위해 특전사령관 정병주(鄭柄宙), 수경사령관 장태완(張泰玩),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金晋基)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許和平)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초대되었습니다. 연회 도중 정승화의 연행 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 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이 대응 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킨 후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 진전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崔圭夏)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는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국방장관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며 거절당하였습니다. 이에 신군부는 국방장관 노재현(盧載鉉)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게 설득하였습니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습니다.

결과

군사반란이 성공하자 신군부는 빠르게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전두환은 대장, 중앙정보부장을 거쳐 대통령에 이르렀고, 노태우 역시 대장, 내무부 장관을 거쳐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이밖에 군사반란에 가담한 신군부 인원들도 요직을 차지하였습니다. 또한, 12.12 군사반란의 성공으로 신군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을 통제하여 민주헌정을 중지시키고 군정으로 회귀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많은 국민과 정치인이 저항 운동을 펼쳤고,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5.18 민주화운동으로까지 어어졌습니다.

쿠데타 나올 수 없는 이유

노무현 정부 때인 지난 2004년 가을, '월간 중앙'에 '군은 청와대를 어떻게 보나'라는 기획 기사가 실렸습니다. 여기서 현역 사단장 K소장이 "이제 한국에서 군사 쿠데타는 영원히 불가능하다"라며 단계별로 쿠데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다섯 가지 이유를 댔습니다.

1. 쿠데타 모의 단계

휴대전화 때문에 보안 유지가 불가능하다. 설사 모의가 성공했더라도 거사로 이어지기 어렵다. 특정 부대, 특정 집단의 일거수일투족이 군인들에 의해 순식간에 세상에 알려지기 때문이다.

휴대폰이 군 장병들에게 허용되어 일상생활 중에 가족들과 친구, 지인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2. 쿠데타 발발 시점

군사를 집결시키고 장비를 앞세워 중앙무대로 치고 들어오려고 해도 교통체증 때문에 이동이 어렵다. 과거에는 통행금지가 있었기 때문에 병력과 장비의 신속한 이동이 가능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중앙 당국의 통제가 없는 한 수도권 교통체증을 극복하기 어렵다.

요즘 서울은 한밤 중에도 대낮처럼 생활하고 차량 또한 늘어서 군이 집단으로 움직인다면 시민들이 쉽게 알아채고 난리가 날 것입니다.

3. 쿠데타 성공 단계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병력과 장비를 중앙무대에 진출시켰다 해도 국민을 설득할 방도가 없다. 과거처럼 몇 안 되는 신문사와 방송사를 접수하는 것으로 국민 동의를 구할 수 없으며 국민은 휴대전화와 인터넷으로 서로 의견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쿠데타군을 응징할 것이 분명하다.

국민들은 5.18 민주화운동처럼 들불처럼 일어나 세계의 이목을 끌 것이 분명합니다. 꼭 그래야만 합니다.

4. 엘리트 집단이 아니다

더 이상 군이 한국 사회의 최고 엘리트 집단이 아니다. 군사 쿠데타는 다른 사회 부문보다 군이 가장 앞서 있는 곳에서나 가능하다. 그래야 군이 명분과 힘을 가지고 다른 부문을 압도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군 이외의 부문들이 앞서 나가 있다.

1980년 대에는 군이 엘리트 집단이었나 봅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더 뛰어난 집단들이 많죠. 예로 의사 집단이 더 군보다는 엘리트로 보이긴 합니다. 

5. 군부대

너무도 명백한 앞의 네 가지 사실을, 누구보다 군이 먼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쿠데타는 더 이상 없다.  

이런 주장을 했던 당시가 20년 정도 전이니 그사이 한국 사회는 더 촘촘해지고 더 개방되어 무모한 쿠데타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민정부의 시대

2000년 이후 쿠데타가 불가능한 가장 큰 이유는 군에 대한 문민 통제가 그만큼 확실해졌기 때문입니다.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임 이후 가장 빠르고 가장 힘 있게 추진했던 게 바로 '하나회' 뿌리 뽑기였습니다. 동시에 정보기관에 대한 문민 우위도 확립했습니다. 이후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군의 정치 개입 가능성이 빠르게 차단되었습니다. 최근까지도 군의 정치 개입과 사조직 방지를 위한 법 장치를 계속해서 쌓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영화 '서울의 봄'을 보면서 스트레스만 받지 마시고 더 이상 이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우리 모두 적극적인 관심과 정치에 대한 참여가 필요합니다. 이상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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